Pinned Tweet
백제와 고구려의 일기토
//
[百済と高句麗の一騎打ち
//
日本書紀
巻第十九 天国排開広庭天皇(あめくにおしはらきひろにわのすめらみこと) 欽明天皇(きんめいてんのう)
百済と高句麗の戦闘
日付
(欽明14年)553年10月20日
連携
早稲田大学電子図書館連携資料
冬10月庚寅朔己酉に、百済の王子余昌(明王の子、威徳王である。)が国中の兵を全て徴発して高句麗に向かった。彼は百合の野に砦を築き、兵士たちと共に寝食を共にした。この日の夕方、広大な平原を見渡すと、豊かで果てしない平原が広がっているのに、人の足跡はほとんど見えず、犬の声も聞こえなかった。その時、突然鼓と笛の音が聞こえた。余昌は驚いて鼓を打ち鳴らし、夜通し固く守り続けた。夜明けに広野を見ると、青山のように軍旗が一面に広がっていた。明るくなると、頸鎧を着けた1騎、鐃を挿した2騎、豹尾を飾った2騎の合計5騎が並んでやってきて、「子供たちが『我々の野に客人がいる』と言っている。どうして礼を尽くして迎えないことがあろうか。今すぐ我々と礼で問答できる者の名前と年齢、官位を知りたい」と言った。余昌は「姓は同姓、官位は杆率、年齢は29歳である」と答えた。百済からも同様に問うと、同じように答えた。ついに軍旗を立てて戦闘が始まった。百済は槍で高句麗の勇士を突き刺し馬から落として首を斬り、その首を槍の先に掲げて戻り兵士たちに見せた。高句麗の将軍たちは激怒した。その時、百済の歓呼の声が天地を裂くようであった。また、偏将が鼓を打ちながら速攻し、高句麗王を東聖山の上まで追い返した。
冬十月庚寅朔己酉、百済王子余昌[明王子、威徳王也。]、悉発国中兵、向高麗国、築百合野塞、眠食軍士。是夕観覧、鉅野墳腴、平原瀰迤、人跡罕見、犬声蔑聞。俄而儵忽之際、聞鼓吹之声。余昌乃大驚、打鼓相応。通夜固守。凌晨起見曠野之中、覆如青山、旌旗充満。会明有着頸鎧者一騎、挿鐃者[鐃字未詳。]二騎、珥豹尾者二騎、并五騎、連轡到来問曰、少児等言、於吾野中、客人有在。何得不迎礼也。今欲、早知与吾可以礼問答者姓名年位。余昌対曰、姓是同姓、位是杆率、年廿九矣。百済反問。亦如前法、而対答焉。遂乃立標而合戦。於是、百済以鉾刺墮高麗勇士於馬斬首。仍刺挙頭於鉾末、還入示衆。高麗軍将、憤怒益甚。是時、百済歓呼之声、可裂天地。復其偏将、打鼓疾闘、追却高麗王於東聖山之上。
翻訳注 001)
百済第27代 威徳王(在位:554〜598)である。『三国史記』百済本紀では、彼が聖王32年(554)に即位したとされている。『日本書紀』によれば、欽明天皇15年(554)冬12月に聖明王が戦死した後、威徳王が欽明天皇18年(557)春3月に即位するまでの3年間は空位となる。567年に作られた昌王明花崗石製舎利函の銘文「百済昌王十三年太歳在 丁亥妹兄公主供養舎利」と最近百済王興寺跡から出土した577年に作られた青銅函舎利器には「丁酉年二月十五日百済王昌為亡王子立刹本舎利二枚葬時神化為三」とあり、「昌王」として登場する。
翻訳注 002)
聖王を指す。
翻訳注 003)
頸周りまで覆う札甲を指す。
翻訳注 004)
高句麗の軍儀仗に関して貴重な資料である。頸鎧を着けた者が5人の中で頭であり、豹尾を挿した2人が部将であり、鐃を持った2人は進軍と退却など軍の進退と連絡を担当する副官と見られる。
翻訳注 005)
子供は高句麗の兵士を指し、客人とは外部の余昌ら百済軍を指す。
翻訳注 006)
同姓、つまり余姓を意味する。この記事は即位前の百済王子(太子)の官等が第5等の杆率であったことを示している。そしてこの年(553)に余昌の年齢が29歳であったならば、余昌は525年に生まれたことがわかる。
翻訳注 007)
高句麗では国同士の戦いの際、このように姓名、官等、年齢を明らかにし、標を立ててから始めるのが慣例であったことを示す資料として興味深い。
翻訳注 008)
この時期の高句麗王は第24代陽原王(在位:545〜559)である。しかしこの時期の『三国史記』、『三国遺事』には高句麗王が百済との戦闘に出陣した記録は見られず、戦争の真偽についての論争がある。
翻訳注 009)
平壌の北東にある大聖山を指す。
//
일본서기
권제19 천국배개광정천황(天國排開廣庭天皇;아메쿠니오시하라키히로니와노스메라미코토) 흠명천황(欽明天皇;킨메이텐노)
백제와 고구려의 전투
날짜
(흠명 14년) 553년 10월 20일
연계
와세다대학 전자도서관연계자료
겨울 10월 경인삭 기유(20일)에 백제 왕자 여창(餘昌) 주 001[명왕 주 002의 아들 위덕왕(威德王)이다.]이 나라 안의 군대를 모두 징발하여 고구려로 향하였다. 그는 백합(百合)의 들판에 요새를 쌓고 군사들과 함께 먹고 잤다. 그런데 이 날 저녁 바라보니 넓은 들은 비옥하고 평원은 끝없이 넓은데, 사람의 자취는 거의 없고 개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때 갑자기 북과 피리 소리가 들렸다. 여창이 크게 놀라 북을 쳐서 맞대응하면서 밤새 굳게 지켰다. 새벽녘에 일어나 넓은 들판을 보니 마치 푸른 산과 같이 군기가 가득하게 덮고 있었다. 날이 밝자 목에 경개(頸鎧)주 003를 입은 자 1기(騎), 작은 징[뇨(鐃)자는 잘 알 수 없다.]을 꼽은 자 2기, 표범 꼬리로 장식한 자 2기 등 모두 합해 5기주 004가 말고삐를 나란히 하고 와서 “어린아이들이 ‘우리 들판에 손님이 와 있다주 005.’고 말하였다. 어찌 예를 갖춰 맞이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지금 속히 우리와 더불어 예로써 문답할 만한 사람의 이름과 나이, 관위를 알고 싶다.”라고 말하였다. 여창이 “성은 동성(同姓)이고 관위는 간솔(杆率)이며 나이는 29세이다주 006.”라고 대답하였다. 백제에서 반문하니 또한 앞에서와 같은 방식으로 대답하였다. 드디어 군기[標]를 세우고 싸우기 시작하였다주 007. 백제는 고구려의 용사를 창으로 찔러 말에서 떨어뜨려 머리를 베고 머리를 창끝에 꽂아 들고 돌아와서 군사들에게 보였다. 고구려군 장수들은 격노하였다. 이때 백제의 환호하는 소리가 천지를 가르는 듯하였다. 또 부장이 북을 치며 속공하여 고구려왕주 008을 동성산(東聖山) 주 009 위에까지 쫓아버렸다.
冬十月庚寅朔己酉, 百濟王子餘昌[明王子, 威德王也.], 悉發國中兵, 向高麗國, 築百合野塞, 眠食軍士. 是夕觀覽, 鉅野墳腴, 平原瀰迤, 人跡罕見, 犬聲蔑聞. 俄而儵忽之際, 聞鼓吹之聲. 餘昌乃大驚, 打鼓相應. 通夜固守. 凌晨起見曠野之中, 覆如靑山, 旌旗充滿. 會明有着頸鎧者一騎, 揷鐃者[鐃字未詳.] 二騎, 珥豹尾者二騎, 幷五騎, 連轡到來問曰, 少兒等言, 於吾野中, 客人有在. 何得不迎禮也. 今欲, 早知與吾可以禮問答者姓名年位. 餘昌對曰, 姓是同姓, 位是杆率, 年廿九矣. 百濟反問. 亦如前法, 而對答焉. 遂乃立標而合戰. 於是, 百濟以鉾刺墮高麗勇士於馬斬首. 仍刺擧頭於鉾末, 還入示衆. 高麗軍將, 憤怒益甚. 是時, 百濟歡呼주 001之聲, 可裂天地. 復其偏將, 打鼓疾鬪, 追却高麗王於東聖山之上.
번역주 001)
백제 제27대 威德王(재위:554~598)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서는 그가 성왕 32년(554)에 즉위한 것으로 되어 있다. 『日本書紀』에 의하면 흠명천황 15년(554) 동12월에 聖明王이 전사한 후 威德王이 흠명천황 18년(557) 춘3월에 즉위할 때까지 3년간 공위가 생긴다. 567년에 만들어진 창왕명화강석제사리감의 명문 「百濟昌王十三秊太歲在 丁亥妹兄公主供養舍利」와 최근 백제 왕흥사지에서 출토된 577년에 만들어진 청동함 사리기에는 「丁酉年二月十五日百濟王昌爲亡王子立刹本舍利二枚葬時神化爲三」이라고 하여 ‘창왕’으로 나온다.바로가기
번역주 002)
성왕을 가리킨다.바로가기
번역주 003)
목 주위까지 두른 札甲을 일컫는다.바로가기
번역주 004)
고구려 군사 儀杖과 관련하여 귀중한 자료다. 경갑을 두른 이가 5인 가운데 우두머리일 것이고, 표범꼬리를 꽂은 2인이 부장이고, 징을 가진 2인은 진군과 퇴각 등 군대진퇴와 연락을 담당하는 부관으로 보인다.바로가기
번역주 005)
어린아이는 고구려 병졸을 일컫는 것이고, 손님이란 외부인인 여창 등 백제군사 일행을 가리킨다.바로가기
번역주 006)
동성, 즉 같은 성이란 餘씨를 의미한다. 위 기사는 즉위 전 백제 왕자(태자)의 관등이 제 5등인 간솔이었음을 알려준다. 그리고 이 해(553)에 여창의 나이가 29세였다면, 여창은 525년에 출생하였음을 알 수 있다.바로가기
번역주 007)
고구려에서는 나라 간에 서로 싸울 때 이처럼 성명, 관등, 나이를 밝히고 표를 세운 다음에 시작하는 것이 의례였음을 알려주는 자료라는 점에서 흥미롭다.바로가기
번역주 008)
이 시기 고구려왕은 제24대 陽原王(재위:545~559)이다. 다만 이 시기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고구려왕이 백제와의 전투에 출장했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아 전쟁 진위여부에 대한 논란이 있다.바로가기
번역주 009)
평양 동북쪽에 있는 大聖山을 가리킨다.바로가기
색인어
이름
여창(餘昌), 명왕, 위덕왕(威德王), 여창, 여창
지명
동성산(東聖山)
youtu.be/25nkn-P9Eu4?si=WEOI…
【史実から見る古代朝鮮半島と日本列島】ヤマト連盟の盟主であるヤマト政権との関係
百済王の将軍としての位階は、ヤマト王よりも高かった。
百済王=鎮東将軍・領楽浪太守・兼使持節・都督百済諸軍事。
楽浪は馬韓・辰韓・弁韓・東濊・沃沮を統治する。
ヤマト王=安東将軍・兼倭国・新羅・任那加羅・辰韓・馬韓諸軍事都督。
ヤマトが任那加羅や馬韓に軍隊を出兵させた場合、当時の東アジアの幕府官職制度上、ヤマトの将軍たちは百済王の指揮を受け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
そもそも、東アジアの幕府官職制度を持ち出すまでもなく、百済が矢や兵糧を補給してくれなければ、倭軍は飢えるしかなかった。
当時、日本列島の原住民たちは、百済・任那加羅系の渡来人たちを臣下として従えていたヤマト王のために、農業を営んだり、漁業をしたり、朝鮮半島へ出兵して百済王から与えられたクエストを達成して帰還し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
百済・任那加羅系の渡来人たちは、日本列島のヤマト連盟の中心地である畿内・河内のヤマトの地に、馬小屋、乗馬用馬具セットの製作工場、鍛冶場、水田や畑、港、土器製作工房、論語を教える学堂などを建設し、ヤマト王と王族たちのために、自分たちの才能を惜しみなく発揮した。
百済の鍛冶職人や任那加羅の陶工たちがいなければ、ヤマトは甲冑も武器も農具も製造す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
食器や祭祀用の器である「須恵器(すえき)」さえ作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
ヤマトの首長(=ヤマト王)は、父系・母系の双方において、百済王・余句(=近肖古王)の子孫である。
百済は、寺院、仏塔、仏像、仏教経典、儒教の学問、甲冑製作技術、農耕技術、造船技術など、あらゆる分野が発達していた先進国だった。
一方、ヤマト政権は、人員を朝鮮半島に派遣し、自ら体を張って海賊行為のクエスト(新羅からのみかじめ料を巻き上げること、任那加羅でヤクザのような振る舞いをすること、高句麗に嫌がらせをすること)を遂行しなければ、百済から最高級のサービスを提供してもらえなかった。
その最高級のサービスとは、さまざまな文明技術を身につけた技術者たちを派遣してもらうことや、中央集権国家を築く方法を段階的に教えてもらうことだった。
西暦6世紀から7世紀にかけては、百済だけでなく、高句麗や新羅もヤマトに画工、僧侶、技術者、横穴式石室の築造技術を持つ職人たちを派遣し、競い合うようにヤマトに最高級のサービスを提供した。
その結果、西暦7世紀後半には、ヤマトの最上層支配階級は、高句麗人・百済人・新羅人によって確固たる地位を占められるようになった。
絵を描くこともできず、仏像を作ることもできず、漢字を書くことも読むこともできない、無知で残忍な縄文人の血を引くヤマトの海賊族長や戦士たちは、次第に中央政界から排除されていった。
팩트로 보는 고대 한반도와 일본열도 야마토 연맹의 연맹장 야마토 정권의 관계
백제 왕이 야마토 왕보다 장군 레벨이 높다
백제 왕= 진동장군 령 낙랑태수 겸 사지절 도독 백제제군사.
낙랑은 마한 진한 변한 동예 옥저를 통치한다
야마토 왕 = 안동장군 겸 왜국 신라 임나가라 진한 마한 도독제군사.
야마토가 임나가라,마한으로 군사 출병 시키면
야마토 장군들은 당시 동아시아 막부 관직 제도상 백제 왕에게 지휘 받아야하고
굳이 동아시아 막부 관직 제도가 아니어도
백제가 화살이나 군량 보급 안 해주면
왜군은 굶어야한다
당시 일본열도 원주민들은
백제 임나가라 계통 도래인들은 신하들로
거느린 야마토 왕을 위해
농사를 짓거나, 어업을 하거나, 한반도로
출병가서 백제 왕이 주는 퀘스트를
완수하고 돌아와야했다
백제 임나가라 계통 도래인들은 일본열도
야마토 연맹의 중심지 키나이 카와치의
야마토 땅에서 마구간,승마용 마구 세트 제작 공장,대장간,논밭,항구, 도기장이 공방 등,논어 학당 을 짓고 야마토 왕과 왕족들을 위해 그들의 재능을 아낌없이 발휘했다
백제 대장장이들,임나가라 도공들이 아니면
야마토는 갑주도 무기구도 농기구도 만들지 못했다
밥 그릇 혹은 제사 그릇인 '스에키'도 만들지 못했다
야마토 수장(=야마토 왕)은 부계 모계 모두
백제 왕 여구(=근초고)의 후손이다
백제는 절,탑,불상,불경,유교 학문, 갑주 제작,농경 기술,조선술 등등 모든게
발달되어있는 선진국이었고
야마토 정권은 사람을 한반도로 보내 몸으로
뛰게하는 해적질 퀘스트(신라 삥뜯기,임나가라에서 야쿠자 짓 하기,고구려 괴롭히기) 를 해야
백제가 야마토 정권에 최상급 서비스(각종 문명 기술 보유한 기술자들 보내주기.
중앙집권 하는 법을 단계적으로 알려주기)를 제공해주는거다
서기 6세기~서기 7세기에는 백제 뿐 아니라
고구려,신라도 야마토에게
화공,승려,기술자,횡혈식석실 제작 기술 보유자 를 보내서 야마토에게 경쟁적으로
최상급서비스를 제공해주고,
그 결과, 서기 7세기 후반 야마토의 최상부
지배층은 고구려 백제 신라인들로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그림 그릴줄도 모르고 불상 만들줄도 모르고
한자를 쓸줄도 읽을줄도 모르고
무식하고 잔인한 죠몬 피 섞인 야마토 해적 족장들이나 전사들은 점점 중앙 정계에서
배제되어갔다
백제 왕이 야마토 왕보다 장군 레벨이 높다
백제 왕= 진동장군 령 낙랑태수 겸 사지절 도독 백제제군사.
낙랑은 마한 진한 변한 동예 옥저를 통치한다
야마토 왕 = 안동장군 겸 왜국 신라 임나가라 진한 마한 도독제군사.
야마토가 임나가라,마한으로 군사 출병 시키면
야마토 장군들은 당시 동아시아 막부 관직 제도상 백제 왕에게 지휘 받아야하고
굳이 동아시아 막부 관직 제도가 아니어도
백제가 화살이나 군량 보급 안 해주면
왜군은 굶어야한다
당시 일본열도 원주민들은
백제 임나가라 계통 도래인들은 신하들로
거느린 야마토 왕을 위해
농사를 짓거나, 어업을 하거나, 한반도로
출병가서 백제 왕이 주는 퀘스트를
완수하고 돌아와야했다
백제 임나가라 계통 도래인들은 일본열도
야마토 연맹의 중심지 키나이 카와치의
야마토 땅에서 마구간,승마용 마구 세트 제작 공장,대장간,논밭,항구, 도기장이 공방 등,논어 학당 을 짓고 야마토 왕과 왕족들을 위해 그들의 재능을 아낌없이 발휘했다
백제 대장장이들,임나가라 도공들이 아니면
야마토는 갑주도 무기구도 농기구도 만들지 못했다
밥 그릇 혹은 제사 그릇인 '스에키'도 만들지 못했다
야마토 수장(=야마토 왕)은 부계 모계 모두
백제 왕 여구(=근초고)의 후손이다
백제는 절,탑,불상,불경,유교 학문, 갑주 제작,농경 기술,조선술 등등 모든게
발달되어있는 선진국이었고
야마토 정권은 사람을 한반도로 보내 몸으로
뛰게하는 해적질 퀘스트(신라 삥뜯기,임나가라에서 야쿠자 짓 하기,고구려 괴롭히기) 를 해야
백제가 야마토 정권에 최상급 서비스(각종 문명 기술 보유한 기술자들 보내주기.
중앙집권 하는 법을 단계적으로 알려주기)를 제공해주는거다
서기 6세기~서기 7세기에는 백제 뿐 아니라
고구려,신라도 야마토에게
화공,승려,기술자,횡혈식석실 제작 기술 보유자 를 보내서 야마토에게 경쟁적으로
최상급서비스를 제공해주고,
그 결과, 서기 7세기 후반 야마토의 최상부
지배층은 고구려 백제 신라인들로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그림 그릴줄도 모르고 불상 만들줄도 모르고
한자를 쓸줄도 읽을줄도 모르고
무식하고 잔인한 죠몬 피 섞인 야마토 해적 족장들이나 전사들은 점점 중앙 정계에서
배제되어갔다
Minamoto Yoshitsune retweeted
Replying to @nitohagosipayo
財閥系だけでしょ。
いい生活ができてるのは。
しかもほんの一握りの大学卒。
定年までいられるのも一握りなんでしょ。
みんな最後はフライドチキン屋って同胞が言ってたよ。w
Minamoto Yoshitsune retweeted
Replying to @Ygdxir43Wb @sae_ange
もちろん塩田は重労働で、労働者は貧者が多かったのですが、明確に奴隷とする制度はありませんでした
ただし塩田に限らず「地主-小作人」という形で不利な契約でまるで奴隷のように働かされているという問題があり、これは1950年前には対応されました
これは韓国でも同時期に対応があったと思います
Minamoto Yoshitsune retweeted
Replying to @warashi_mikado @sae_ange
혹시 일본 역사상에서 염전 노동에 대한 인식은 어떤지 자료가 있을까요?
한반도에서는 삼국시대부터 염전일은 중노동이라 전쟁포로를 노예로 삼아 일하게 했고, 타국의 왕을 모욕할 때 염전 노예로 만들겠다는 식의 발언, 꽤 최근까지도 장애인을 감금해서 염전 노예로 부려먹은 사건이 있었거든요.
Minamoto Yoshitsune retweeted
한국인의 일본에 대한 이미지는 정말 나이에 따라서 정말 큰 거 같음.
80대 이상: 무서운 나라
60-80대 : 선진국이고 배워야 하는 나라. 첨단 기술의 나라.
30-50대 : 예전에 잘살았지만 요새는 한국이랑 비슷한 나라.
여행하기 좋은 나라.
20대 이하: 우리보다 뒤떨어진 나라.
귀엽고 레트로 감성을 느끼기 좋은 나라.
Minamoto Yoshitsune retweeted
日本人の韓国に対するイメージ
50〜80代:日本より格下の国
40〜30代:韓国ドラマや料理が美味しい国。
20代以下:K-POPや韓ドラで、アジア人文化を世界に広めリスペク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