一本の木を切り倒すために、爆撃機や航空母艦まで動員された。
1976年8月18日、板門店の共同警備区域で、枝払い作業を警護していた米軍将校2人が北朝鮮軍に殺害された。視界を遮っていたポプラの枝を切りに向かったアーサー・ボニファス大尉とマーク・バレット中尉だった。
北朝鮮軍は作業の中止を求めた後、現場の国連軍警備兵を襲撃した。枝を切るために持ち込まれた斧が、人を殺す凶器となった。韓国軍と米軍の警備兵も負傷した。韓国で「板門店斧蛮行事件」として記憶されている事件だ。
3日後、米韓両国は同じ場所に戻ってきた。今度は枝を払う代わりに、木を切り倒すことにした。
作戦名は「ポール・バニヤン」。アメリカの民話に登場する巨人の木こりの名前だった。
チェーンソーを手にした米軍工兵を武装部隊が護衛し、韓国軍の特殊部隊も投入された。上空には攻撃ヘリコプターや戦闘機、B-52戦略爆撃機が動員され、空母ミッドウェーを中心とする艦隊も朝鮮半島近海へ移動した。北朝鮮軍が再び攻撃してきた場合に備えた武力示威だった。
工兵たちが木を切り倒す間、北朝鮮軍は見守っていたが、攻撃はしなかった。作業は新たな交戦もなく終わった。
同じ日、金日成は事件に遺憾の意を表するメッセージを送った。ただし、北朝鮮軍による殺害の責任を明確に認めた謝罪ではなかった。事件後、共同警備区域の中でも軍事境界線を挟んで双方の警備区域が分離された。
切り倒された木があった場所には、2人の将校を追悼する記念碑が残されている。ボニファスは少佐に追叙され、彼の名は板門店近くの基地の名前となった。
この作戦の目標は一本の木だったが、その背後にはさらに大きな意味があった。仲間を失った場所に戻り、作業を終えるという意志。そして、再び攻撃すれば反撃するという警告だった。
一本の木を切り倒すためにこれほどの軍事力が必要だった場所を、私たちは果たして平和な共同警備区域と呼べただろうか。
Thai Soldiers Held a Korean Hill Until the Armistice.
Chinese troops kept attacking. The Thai battalion held its position.
It was July 1953. The Korean War was nearing its armistice, but at Hill 351 near Kimhwa, Thai soldiers still had a position to defend.
On 13 July, the battalion, attached to the U.S. 2nd Infantry Division, moved onto the hill. From 14 to 27 July, it repelled repeated Chinese attacks with the division’s supporting fire and close-range combat.
An approaching agreement did not make the battlefield safe. Until the fighting stopped, the men holding that hill still faced the possibility of never going home.
They held on until the armistice was signed on 27 July.
South Korea’s Ministry of Patriots and Veterans Affairs credits their defense with keeping Hill 351 on the southern side after the armistice.
For these Thai soldiers, the final days of the war meant defending ground far from their own country. For Korea, their service became part of the history of the land they helped protect.
As a Korean, I offer my deep gratitude to Thailand’s veterans and to the Thai people.
When the guns finally fell silent, what was the first thing those soldiers thought of?
He Defeated the Mongol Invasions. Then He Became a Monk.
Vietnam’s emperor did not leave his throne because he had lost a war.
Trần Nhân Tông helped his kingdom survive two invasions by the armies of Kublai Khan. Then he handed the throne to his son.
In 1285 and again in 1287–1288, Yuan forces invaded Đại Việt, in what is now northern Vietnam. Alongside his father, the retired emperor, and commanders including Trần Hưng Đạo, he led the resistance.
This was the emperor on the throne when Trần Hưng Đạo’s forces destroyed a Yuan fleet at Bạch Đằng.
But victory was not the end of his story.
In 1293, he abdicated. He remained involved in government as retired emperor, guiding his son. His departure from the throne was a transition, not an overnight disappearance from public life.
By 1299, he was pursuing monastic life at Yên Tử, the mountain associated with the rise of Trúc Lâm, a distinctly Vietnamese Zen Buddhist tradition.
The ruler who had helped defend a kingdom became one of its most revered Buddhist figures.
Vietnam remembers him as Phật hoàng—the “Buddha Emperor.”
We often remember rulers for the territory they conquered or the power they held. His story continued beyond the throne, in a religious tradition that outlived his dynasty.
What do you make of a victorious emperor who chose the life of a monk?
Replying to @Tsiberia
경복궁 점령도 경비가 공격해서 어쩔 수 없이 점령했다 이런 논리도 있었구요...알다가도 모를 이웃나라 일본입니다ㅠ
Replying to @Tsiberia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으로 예방차원에서 어쩔 수 없이 병합을 했다 이런 논리 꽤나 자주 봤습니다ㅠ
나무 한 그루를 베기 위해 폭격기와 항공모함까지 움직였다.
1976년 8월 18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서 가지치기 작업을 지키던 미군 장교 두 명이 북한군에게 살해됐다. 시야를 가리던 미루나무의 가지를 정리하러 갔던 아서 보니파스 대위와 마크 배럿 중위였다.
북한군은 작업 중단을 요구하다가 현장의 유엔군 경비병들을 공격했다. 나뭇가지를 자르려고 가져온 도끼가 사람을 죽이는 흉기가 됐다. 한국군과 미군 경비병들도 다쳤다. 우리가 ‘판문점 도끼 만행사건’으로 기억하는 일이다.
사흘 뒤, 한미 양국은 같은 장소로 돌아왔다. 이번에는 가지를 치는 대신 나무를 베어버리기로 했다.
작전명은 ‘폴 버니언’. 미국 민담에 등장하는 거인 벌목꾼의 이름이었다.
전기톱을 든 미군 공병들을 무장 병력이 호위했고, 한국군 특전사도 투입됐다. 상공에는 공격헬기와 전투기, B-52 전략폭격기가 동원됐으며, 항공모함 미드웨이 전단도 한반도 인근 해역으로 이동했다. 북한군이 다시 공격할 경우에 대비한 무력시위였다.
공병들이 나무를 자르는 동안 북한군은 지켜봤지만 공격하지 않았다. 작업은 추가 교전 없이 끝났다.
같은 날 김일성은 사건에 유감을 표하는 메시지를 보냈다. 다만 북한군의 살해 책임을 명확히 인정한 사과는 아니었다. 사건 이후에는 공동경비구역 안에서도 군사분계선을 사이에 두고 양측 경비구역이 분리됐다.
잘린 나무가 있던 자리에는 두 장교를 기리는 표석이 남았다. 보니파스는 소령으로 추서됐고, 그의 이름은 판문점 인근 기지의 이름이 됐다.
이 작전의 목표는 나무 한 그루였지만, 그 뒤에 걸린 것은 더 컸다. 동료를 잃은 자리로 돌아가 작업을 끝내겠다는 의지, 그리고 다시 공격하면 대응하겠다는 경고였다.
나무 한 그루를 베는 데 이만한 군사력이 필요했던 곳을, 우리는 과연 평화로운 공동경비구역이라고 부를 수 있었을까?
Replying to @tmo_melonmaster
What stands out most is that it’s a village of ordinary people who feel familiar to us all.🤗
신라와 가야가 맞닿던 곳에도 평범한 일상이 있었다.
부산 정관신도시를 개발하던 땅에서 오래된 마을의 흔적이 드러났다. 가동유적에서 발굴된 집터는 150곳, 고상창고는 73동, 저장구덩이는 23기였다. 새로 사람들이 살아갈 도시 아래에, 먼저 그곳에서 살아간 사람들의 집과 창고가 남아 있었던 것이다.
삼국시대 기장은 신라와 가야 문화가 맞닿던 접경지였다.
가동유적의 네모난 집자리와 구들에서는 신라 주거문화의 영향을 읽어내는 연구도 있다. 두 문화의 만남은 무덤에 묻힌 귀한 물건뿐 아니라 사람들이 불을 때고 몸을 누이던 집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이곳의 생활을 보여주는 것은 화려한 보물보다 집과 살림의 흔적이다. 구들은 취사와 난방에 쓰였고, 창고와 저장구덩이에는 곡식과 식량을 보관했다.
당시 사람들이 생선을 많이 먹었다는 박물관의 설명도 눈길을 끈다. 삼국시대의 밥상이라고 해서 오늘날과 전혀 동떨어진 음식만 올라왔던 것은 아니다. 음식을 담던 그릇과 조리도구를 보면, 멀게 느껴지던 시대에도 우리가 알아볼 수 있는 생활이 있었다.
정관박물관에는 가동유적 36호 집자리를 재현해 놓았다. 왕궁이나 거대한 성곽 대신 사람들이 살아가던 집 안을 들여다볼 수 있는 공간이다. 직접 보고 놀랐던 것도 바로 그 평범함이었다.
역사책에는 왕과 장군의 이름이 남았지만, 그 시대를 살아낸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름을 남기지 못했다. 가동에는 그 이름 대신 집터와 창고가 남아 있다.
우리가 삼국시대를 떠올릴 때, 전쟁 사이에서 밥을 짓고 살아가던 사람들은 얼마나 생각하고 있을까?
Replying to @BanNongPhoThi
Indeed, Yi Sun-sin continued to fight foreign invaders under extremely harsh conditions.
Replying to @parksundal0528
ㅋㅋㅋㅋㅋ진짜 믿는 사람이 문제가 아닐까 할 정도라...웃어주는게 더 위험한 건 아닐까 싶을 정도의 수준은 맞네요ㅋㅋㅋ













